‘노매드랜드’는 미국의 노년층 유랑민들의 삶을 조명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진짜 자유에 대해 묻는다. 절제된 연출과 실제 유목민 출연으로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깊은 울림을 전하는 영화다.
정착하지 않기에 도달한 자유
2020년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쓴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감독 클로이 자오는 비전형적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광활한 미국의 도로 위로 데려가며, 정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따라간다.
영화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경제 불황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무너진 후, 밴에서 거주하며 미국 전역을 떠도는 ‘노매드(유목민)’로 살아간다. 그녀는 특정한 목적지도 없이 일을 찾아 떠돌고, 계절에 따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영화는 펀의 상황을 단순한 ‘빈곤’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펀은 자발적으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빛과 말투, 행동에는 세속적인 기준과는 다른 삶의 깊이가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소유’보다는 ‘존재’, ‘성공’보다는 ‘존엄’을 이야기하며, 관객에게 새로운 삶의 철학을 제시한다.
<노매드랜드>는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 대신, 일상의 단면들을 차분히 이어붙인다. 도시의 소음 대신 광야의 바람, 빠른 대사 대신 침묵과 시선이 중심이 되는 이 영화는, 오히려 그 조용함 속에서 더 큰 진실을 끌어낸다. 현실과 극 사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에 선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유목민의 시선으로 본 미국의 민낯
<노매드랜드>는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펀이 일하던 회사가 도시 자체와 함께 사라지고, 그녀는 집을 잃는다. 영화 속 배경은 미국 네바다, 애리조나, 사우스다코타 등 거대한 풍경을 품은 땅들이지만, 그 안에서 펀이 마주하는 현실은 척박하다.
펀은 아마존 창고, 햄버거 가게, RV 캠프 등에서 임시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고단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불행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곧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 즉 노동이 단순히 생존이 아닌 존재의 일부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실제 유목민들이 배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밥 웰스, 린다 메이, 스웽키 같은 실제 인물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로 인해 영화는 허구를 뛰어넘는 진정성을 획득한다. 그들의 삶은 결핍이 아닌, 선택과 태도의 문제로 그려진다.
감독 클로이 자오는 이들의 삶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조용히, 멀리서 이들을 지켜본다. 그 속에서 관객은 펀의 외로움뿐 아니라, 공동체 속 따뜻함, 스쳐가는 만남이 주는 위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다양한 감정을 엿보게 된다.
펀은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회피하지도, 극복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 이동은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일 수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과거와의 관계 맺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 펀은 떠돌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여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노매드랜드>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상실을 겪고, 관계에서 벗어나며, 홀로 서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시간들을, 결코 초라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닌 ‘인간적인 여정’으로 그려낸다.
진짜 삶은 정착이 아닌, 계속 살아가는 것
영화의 마지막, 펀은 과거의 집을 다시 찾아간다. 그곳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공간이다. 그녀는 그 공간을 조용히 둘러본 뒤, 다시 길 위로 떠난다. 이 장면은 어떤 감정적 클라이맥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펀은 과거를 완전히 끊어내지 않고, 기억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노매드랜드>는 ‘삶의 목적은 정착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소유하지 않아도, 명확한 방향이 없어도, 우리가 누군가와 스쳐 지나가며 나눈 미소와 대화가 삶을 구성하는 전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는 자연과의 교감, 고요함 속의 풍경,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순간적인 연결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빠르게 소비되고 평가되는 시대에, ‘멈춰 있음’이 아닌 ‘흘러감’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펀의 삶은 누군가에겐 비정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삶의 매 순간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존재는, 어쩌면 가장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노매드랜드>는 결핍이 아닌 자율을, 고독이 아닌 자유를 그린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모두에게 향한 질문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