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는 도덕적 판단, 죄와 응보, 가족이라는 테마를 신화적 구조와 불길한 리얼리즘 속에 섞어낸 심리 스릴러 영화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기괴함 속에 깊은 철학적 질문을 담은 독특한 작품이다.
현대의 의사, 신화적 재앙과 마주하다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응보의 서사’를 현대적인 시공간 안에 재구성한, 매우 독특하고 실험적인 심리 스릴러이다. 이 작품은 2017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 <더 랍스터> 이후 그만의 불편하고 건조한 연출 스타일을 더욱 밀도 있게 담아냈다.
영화는 심장 전문 외과의사인 스티븐(콜린 파렐)과 그의 가족, 그리고 스티븐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는 소년 마틴(배리 케오건)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초반은 일상적이고 평온하게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조여 오고, 관객은 그 원인을 모른 채 심리적 압박에 갇힌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음산한 음악, 어두운 조명, 갑작스러운 자극이 없다. 대신 조용한 대사, 건조한 분위기, 기계처럼 무표정한 인물들의 행동이 오히려 더 깊고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그리스 신화 ‘아가멤논과 아르테미스’ 이야기**에서 구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가멤논은 신의 사슴을 죽인 대가로 딸을 제물로 바쳐야 했고, 이 영화 속 스티븐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앗아간 대가로 가족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킬링 디어>가 말하는 도덕, 죄책감, 공의의 개념이 현대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심도 있게 해석하고자 한다.
가해자 없는 죄, 응보 없는 정의
<킬링 디어>의 핵심은 '책임'이다. 주인공 스티븐은 외과의사로서 환자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지만, 이는 명백한 과실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그러나 마틴은 말한다. “균형을 맞춰야 해요. 누군가는 죽어야 해요.”
여기서 영화는 ‘법’이 아닌 ‘신화적 응보’를 따른다.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질서, 즉 **신의 저주와도 같은 재앙**이 가족에게 닥친다. 두 아이는 차례로 다리가 마비되고, 음식도 거부하며, 서서히 죽어간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스티븐의 아내조차 이 모든 재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감한다.
관객은 스티븐에게 감정 이입하면서도 동시에 마틴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이 모든 상황에 ‘절대적 악인’을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틴은 괴물도, 귀신도 아니며 그저 평범한 소년이다. 하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기이하게 냉정한 언어는 관객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란티모스 감독의 연출은 이 기묘한 분위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롱숏과 슬로우 줌을 반복하는 카메라, 대사에서 감정을 철저히 제거한 배우들의 연기, 음향보다 더 무서운 침묵의 사용은 관객을 몰입하게 하면서도 극도의 불편함을 만든다.
특히 결말로 향하는 장면에서 스티븐은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선택해 죽여야만 한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윤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갈등하지만 결국 눈을 가리고 ‘무작위’라는 이름의 방식으로 선택을 한다. 이것은 정의인가? 책임인가? 운명인가? 관객은 이 질문 앞에서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신화는 끝났지만, 책임은 지금도 유효하다
<킬링 디어>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모호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희생자인가, 응보는 정당한가? 이 질문에 영화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에게 판단을 위임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서스펜스나 미스터리의 여운이 아니라, **윤리적 딜레마**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은 죽음, 인간의 한계,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책임은 현실에서도 빈번히 마주치는 문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단순히 이상하고 불편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신화적 구조를 통해 현대인의 도덕 의식과 감정의 마비**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차가운 선택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한다.
‘성스러운 사슴의 죽음’이라는 제목은 곧 ‘성스러운 질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 붕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킬링 디어>는 말한다. “때로는 도덕조차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는 진짜 공포이며, 여운이다.